불교 개혁주의 운동의 뿌리

Posted by 향수코디
2008. 1. 28. 15:30 태국정보/태국불교

                  불교 개혁주의 운동의 뿌리
                                                                                                                                조흥국

 
(Narai, 1656-1688) 왕은 평민들이 출가를 부역()회피의 방편으로 삼으며 승려들이 공부를 게을리하자 비구의 자질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도입했다. 18세기말의 딱신(Takshin, 1767-1782)왕은 승려들이 함부로 살생하고, 음행하고, 술 마시고, 금은보화를 축적하는등 가장 기본적인 계율을 범하는 지경에 이르자 비행()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키는 등 상가의 정화를 단행했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방콕 왕조의 창건자인 라마(Rama) 1세(1782-1809)는 당시 불교의 전반적인 세속화에 대해 폭넓은 개혁을 추진했다. 사회의 도덕적 타락이 아유타야(Ayutthaya)왕조(1351-1767)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보았던 그는 불교계의 질서 회복을 중시했다. 그리하여 시장을 배회하고 음악 및 연극 공연에 기웃거리며 도박을 하고 이단적인 주술행위에 탐닉해 있었던 승려들의 비행을 지적하고 불자()로서의 경건한 행동을 요구하는 불교법령들을 제정했다. 또한 1788년에는 결집() 즉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내용적으로 통일되지 않았던 불경들을 개정하고 새로운 삼장()을 편찬했다.

 오늘날 태국 불교의 개혁주의 운동의 원천은 라마1세의 손자인 라마4세 몽꿋(Mongkut)의 불교개혁 운동이라고 본다. 몽꿋은 등위하기 전 1824년부터 1851까지 불문() 에 몸담고 있는 동안 팔리(Pali :소승불교 경전언어)어로 쓰여진 불경 원전들을 광범위하게 연구함으로써 당시태국 불교가 많은 부분에서 원시 불교의 가르침에서 어긋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또한 카톨릭 신부들과 개신교 선교사들을 포함한 다양한 서양인들과 접촉하면서 그들로부터 라틴어와 영어 그리고 서양의 학문을 배웠다. 이를 통해 얻어진 서양의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은 그가 태국불교에서 미신 및 주술 등 비불교적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역한 것에서 반영되었다. 몽꿋의 불교개혁은 특히 비구의 수계삭()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몬(Mon)종파의 수계식이 경전에 충실한 더욱 순수한 형태라고 간주한 몽꿋은 d를 바탕으로 새로운수계식을 도입했는데, 이것은 당시 승려들의 계율적 정통성을 의문시한 행위였다. 그는 1830년대말에 탐마윳(Thammayut: '붓다의 가르침에 충실한자')이란 새로운 종파를 세웠다. 그 이름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는 기존의 마하니까이(M몸-nikai)종파에 비해 더욱 엄격히 지킬 것을 강조했다.

 흔히 경건주의(scriptualism), 지성주의(intellectualism), 합리주의(rationalism)의 특징들로|써 설명되는 몽꿋의 불교개혁은 근대 태국 불교의 초석이라고 간주된다. 외형적인 의식()으로부터의 탈피를 강조하고 학문적 성찰을 중시한 탐마윳 종파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한 왕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발전했다. 탐마윳 운동은 1881년 몽꿋의 아들인 쭐라롱꼰(Chulalongkon, 1868-1910)왕의 시대에 독립적인 종파로서의 공식적인 지위를 획득했으며, 특히 쭐라롱꼰의 이복동생이자 1893년 탐마윳 종파의 종정()이 된 와치라얀(Wachirayan)의 지도하에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다. 1910년에는 와치라얀 종정이 태국 불교계의 수장인 상카랏(sangkharat: 팔리어)즉 승왕()에 임명됨으로써 탐마윳 종파의 영향력은 절정에 달했다. 이로써 비록 전체 사원 및 승려의 숫자에서는 마하니까이 종파가 여전히 절대적으로 우세했지만, 왕실의 강력한 후원을 등에 업은 탐마윳 종파는 태국불교의 일리트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고 태국불교에 개혁의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와치라얀은 탐마윳 정신에 입각하여 승려뿐만 아니라 재가신도()의 교육을 중시하고 산가조직을 전국적으로 개편하는 등 불교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

 태국의 불교는 개인의 해탈을 중시하는 소승계통의 테라바다(Theravada)불교이며 이에 따라 아란냐바시(arannavasi)즉 삼림거주()수도승의 전통이 강하다. 이 아란냐바시 전통은 탐마윳 종파와 함께 오늘날 태국 불교의 개혁주의 운동의 정신적 온상이 되었다. 태국의 삼림거주 수도승들은 원래 계율에 대해서는 방만적이지만 초능력을 소유한 자들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920-30년대 활동을 전개한 아란냐 바시 전통의 몇몇 승려들은 다른 수도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특히 아짠 사오(Achan Sao)와 그의 제자 아짠 문은 초능력을 중시하지 않으며 담마 즉, 불법과 비나야 즉 계율에 대한 탐마윳 종파의 교리해석을 수용하고, 붓다고사(Buddhaghosa)가 쓴 청정도론()으로부터 명상수행의 방식을 취했다.

 이로써 그들은 19세기 테라바다 불교의 두 가지 주요 개혁적 요소였던 계율의 철저한 준수와 엄격한 명상수련을 융합한 셈이었다. 특히 아짠 문(1870-1949)은 태국의 동북부 지방에서 탐마윳 종파의 유명한 명상수련 선생이 되어 많은 추종자들을 끌어들였다. 그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아짠 차는 동북부 지방의 우본(Ubon)에서 한 국제적 선원()의 주지로 있으며, 여기에 많은 서양 불교도들이 수련하고 있다. 단순한 생활과 금욕적 수도를 강조하는 아짠문의 전통은 현대 태국 불교의 다양한 개혁주의 운동들에게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전통과 현대97년 가을호 중,
                          외국의 전통과 현대, 태국 불교의 개혁주의 운동p.312-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