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을 알려면
왕실에 대한 타이인의 깊은 신뢰
조흥국
19세기말 서양 제국주의의 열풍이 아시아를 휩쓸고 지나갈 때, 동남아국가들 중 유일하게 식민지화되지 않았던 나라. 인구의 80% 이상이 불교를 믿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남양의 관광국으로 잘 알려져 있는 나라. 풍부한 지하·임산·수산자원을 보유하고 있고, 세계 최대의 쌀수출국이며, 최근 활발한 산업발전을 통해 신흥공업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나라.
태국은 한국만큼 긴 역사는 갖고 있지 않지만 왕실의 전통이 아직까지 끊이지 않고 내려오고 있다. 1932년 혁명을 통해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넘어왔을 뿐이다. 현 국왕은 짜끄리 왕조의 제 9대 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1782년 방콕의 건설과 함께 시작되어 일명 방콕 왕조 (혹 라따나꼬신 왕조)라고도 불리는 짜끄리 왕조의 왕들은 흔히 라마(Rama)의 칭호로 불리는데, 이에 따라 현 국왕은 라마 9세가 된다. 1946년 그의 형이자 라마 8세인 아난 마히돈이 총에 맞아 죽은 시체로 발견된 후, 느닷없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 푸미폰은 오늘날 생존하고 있는 세계의 군주들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를 누리고 있다.
타이 국민은 어릴 때부터 국가, 종교, 그리고 국왕에 대한 충성의 교육을 받는다. 국왕은 비록 헌법에는 정치적 실권이 없는 국가의 상징적 수반으로 못박혀 있으나, 오늘날 국왕이 없는 태국의 사회는 상상조차 할 수도 없다. 불교의 수호자로서, 왕조사 전통의 계승자로서 그는 타이 사회의 정점에 놓여 있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왕은 힌두신인 시바 혹은 비쉬누의 화신으로서, 때로는 전생에 공덕을 많이 쌓은 보살로서 간주되어 왔다. 그리하여 19세기말에 공식적으로 부복제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이 국민은 여전히 왕을 알현할 때 그 발 앞에 엎드려 긴다.
태국 국왕의 이러한 사회적인 위치는 종종 정치적인 역할로 연결되기도 한다. 1973년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들이 경찰의 무력탄압에 쫓기고 있을 때, 푸미폰이 전혀 뜻밖에 왕궁의 문을 열어 이들을 들여보냈는데, 이로써 당시 집권군부에 대한 타이 사회의 신뢰가 크게 떨어졌다. 1992년 5월, 권력의 야욕에 눈먼 군부가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여 수백명의 사상자가 났을 때, 푸미폰 국왕이 군부와 민주세력간의 중재자로 나섰고, 결국 군부가 퇴진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1995년 여름에는 방콕의 교통난을 효과적으로 해결치 못하고 홍수에 제대로 대비치 않은 현 정부를 질타했다.
푸미폰은 일년의 대부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농부들과 소수민족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해결책을 강구하며 환경보호운동을 이끌고 있다. 정치적 안정이 필요할 때, 사회적 문제에 관한 논의가 일어날 때, 언제부턴가 타이 국민은 그들의 국왕을 바라본다. 푸미폰왕 스스로 타이 사회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수년 전에 그는 외신기자들에게 "태국의 왕은 국가의 혼과 같은 것이다", "비록 입헌군주는 국가와 함께 변할 수 밖에 없지만 그러나 국가의 정신을 지켜야 하며, 다양한 국민속에 공유하는 그 무엇을 구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푸미폰과 타이 사회간의 이러한 관계는 짜끄리 왕실에 대한 타이 사회의 두터운 신뢰와 짜끄리 왕실의 스스로에 대한 긍지에서 그 역사적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짜끄리 왕조의 역대 왕들중 타이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왕은 1868년부터 1910년까지 통치하면서 국가의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나라를 서구 식민지화의 위협으로부터 지킨 라마 5세인 쭐라롱꼰이다. 방콕의 국회의사당 옆에 서 있는 이 왕의 동상 앞에는 매주 화요일 밤마다 수천 명씩 사람들이 몰려온다. 대부분 가족단위로 와서 동상주위의 넓은 광장에 돗자리를 깔고 작은 제단을 정성스럽게 세운다. 제물들 가운데는 꽃, 양초, 향 외에도 쭐라롱꼰이 생존시 애호했다고 전해지는 장미, 시거, 브랜드위스키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가능한 한 핑크색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핑크가 화요일의 색이고 화요일은 쭐라롱꼰이 태어난 요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자들은 귀신에게나 올리는 삶은 돼지머리를 바치는가 하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악사와 무희들을 불러 가무의 정성을 바치기도 한다. 쭐라롱꼰에 대한 경배는 지난 수년간 갈수록 퍼지고 있다. 그의 초상화를 모신 제단은 이제 가게, 식당, 여염집 등 도처에서 발견된다. 많은 금은방들은 라마 5세의 제단을 가게 중앙에 모셔놓고 장사가 잘 되기를 빈다. 그의 사진을 담은 핀이나 메달이 마치 영험있는 부적처럼 잘 팔린다.
쭐라롱꼰왕 숭배를 둘러싼 최근의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그동안 다각도로 설명되어 왔는데, 공통적인 견해는 그것이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 민감한 태국 중산층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즉 이들은 지난 수십년간 빠른 경제성장과 급격한 사회변화를 통해 새로운 사회적 욕구와 영감을 갖게 되었지만 종래의 귀신신앙은 이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며, 새로운 사회적, 문화적 갈등들을 전통적인 불교가 만족스럽게 해결하거나 설명하지 못한다고 본다. 그리하여 근대화, 발전, 번영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라마 5세에게서 새로운 수호신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혹은 민중의 일상적인 이해관계로부터 갈수록 멀어져 가는 국가권력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는 중산층이 더욱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갈망하는데, 이때 개혁가로서의 쭐라롱꼰왕을 숭배함으로써 이상적인 국가상에 대한 그들의 모색을 표출한다는 것이다.
쭐라롱꼰왕에 대한 숭배는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 왕실에 대한 타이 사회의 깊은 신뢰를 반영한다. 푸미폰왕이 오늘날 타이 사회의 구심점이자 안정의 상징으로서 존경받고 있는 것만큼, 타이 사회는 짜끄리 왕조를 긍정적으로 쳐다본다. 비록 국정보다는 연극과 문학에 더욱 많은 정열을 쏟았고 동성연애의 성향을 지녔던 라마 6세 와치라웃, 우유부단한 성격의 라마 7세 쁘라차티뽁, 그리고 비극의 주인공 라마 8세가 그 사이에 있으나, 이들은 방콕 왕조의 위대한 두 왕인 쭐라롱꼰과 푸미폰의 찬란한 후광의 그늘에 편안히 누워 있다. 태국 국민은 방콕 왕조의 맥이 쭐라롱꼰, 그리고 그의 손자인 푸미폰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적잖이 만족하고 있는 듯 하다.
1982년 푸미폰 국왕은 심장장애와 폐렴으로 수개월간 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었다. 이 때 그의 후계자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푸미폰에게는 1950년에 결혼한 시리킷 왕비와의 사이에 세 명의 자식이 있는데, 그 중 장남이자 외동아들인 와치라롱꼰 왕자가 이미 1972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후계자가 확정된 것은 결코 아니다. 현행의 태국 헌법에 의하면 왕이 그의 후계자를 선정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만일 왕이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으면 추밀원이 후계자를 선정할 수 있는데, 이 때 공주도 선정대상이 될 수 있다. 이에 따라 평판이 좋지 않은 왕자 대신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맏공주 시린톤이 라마 10세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다양한 국제적 행사들을 주관하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거의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시린톤 공주는 국내외에 폭넓은 지지자를 갖고 있다.
그러나 왕위계승에 관한 논의는 아직 시기상조이다. 95년 초에 심장수술차 일시 병원신세를 다시 졌지만, 그의 깡마른 체격과 부지런한 활동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건강은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주치의들의 말에 의하면 1927년생인 왕은 아직도 2, 30년 정도는 너끈히 나라를 위해 봉사할 수 있다. 이것은 정말 태국 국민 모두가 바라는 바다.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 혼란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 푸미폰왕과 같은 국가의 기둥이 있는 것은 태국으로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동남아 선교정보센터」에서
조흥국
19세기말 서양 제국주의의 열풍이 아시아를 휩쓸고 지나갈 때, 동남아국가들 중 유일하게 식민지화되지 않았던 나라. 인구의 80% 이상이 불교를 믿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남양의 관광국으로 잘 알려져 있는 나라. 풍부한 지하·임산·수산자원을 보유하고 있고, 세계 최대의 쌀수출국이며, 최근 활발한 산업발전을 통해 신흥공업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나라.
태국은 한국만큼 긴 역사는 갖고 있지 않지만 왕실의 전통이 아직까지 끊이지 않고 내려오고 있다. 1932년 혁명을 통해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넘어왔을 뿐이다. 현 국왕은 짜끄리 왕조의 제 9대 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1782년 방콕의 건설과 함께 시작되어 일명 방콕 왕조 (혹 라따나꼬신 왕조)라고도 불리는 짜끄리 왕조의 왕들은 흔히 라마(Rama)의 칭호로 불리는데, 이에 따라 현 국왕은 라마 9세가 된다. 1946년 그의 형이자 라마 8세인 아난 마히돈이 총에 맞아 죽은 시체로 발견된 후, 느닷없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 푸미폰은 오늘날 생존하고 있는 세계의 군주들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를 누리고 있다.
타이 국민은 어릴 때부터 국가, 종교, 그리고 국왕에 대한 충성의 교육을 받는다. 국왕은 비록 헌법에는 정치적 실권이 없는 국가의 상징적 수반으로 못박혀 있으나, 오늘날 국왕이 없는 태국의 사회는 상상조차 할 수도 없다. 불교의 수호자로서, 왕조사 전통의 계승자로서 그는 타이 사회의 정점에 놓여 있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왕은 힌두신인 시바 혹은 비쉬누의 화신으로서, 때로는 전생에 공덕을 많이 쌓은 보살로서 간주되어 왔다. 그리하여 19세기말에 공식적으로 부복제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이 국민은 여전히 왕을 알현할 때 그 발 앞에 엎드려 긴다.
태국 국왕의 이러한 사회적인 위치는 종종 정치적인 역할로 연결되기도 한다. 1973년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들이 경찰의 무력탄압에 쫓기고 있을 때, 푸미폰이 전혀 뜻밖에 왕궁의 문을 열어 이들을 들여보냈는데, 이로써 당시 집권군부에 대한 타이 사회의 신뢰가 크게 떨어졌다. 1992년 5월, 권력의 야욕에 눈먼 군부가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여 수백명의 사상자가 났을 때, 푸미폰 국왕이 군부와 민주세력간의 중재자로 나섰고, 결국 군부가 퇴진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1995년 여름에는 방콕의 교통난을 효과적으로 해결치 못하고 홍수에 제대로 대비치 않은 현 정부를 질타했다.
푸미폰은 일년의 대부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농부들과 소수민족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해결책을 강구하며 환경보호운동을 이끌고 있다. 정치적 안정이 필요할 때, 사회적 문제에 관한 논의가 일어날 때, 언제부턴가 타이 국민은 그들의 국왕을 바라본다. 푸미폰왕 스스로 타이 사회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수년 전에 그는 외신기자들에게 "태국의 왕은 국가의 혼과 같은 것이다", "비록 입헌군주는 국가와 함께 변할 수 밖에 없지만 그러나 국가의 정신을 지켜야 하며, 다양한 국민속에 공유하는 그 무엇을 구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푸미폰과 타이 사회간의 이러한 관계는 짜끄리 왕실에 대한 타이 사회의 두터운 신뢰와 짜끄리 왕실의 스스로에 대한 긍지에서 그 역사적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짜끄리 왕조의 역대 왕들중 타이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왕은 1868년부터 1910년까지 통치하면서 국가의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나라를 서구 식민지화의 위협으로부터 지킨 라마 5세인 쭐라롱꼰이다. 방콕의 국회의사당 옆에 서 있는 이 왕의 동상 앞에는 매주 화요일 밤마다 수천 명씩 사람들이 몰려온다. 대부분 가족단위로 와서 동상주위의 넓은 광장에 돗자리를 깔고 작은 제단을 정성스럽게 세운다. 제물들 가운데는 꽃, 양초, 향 외에도 쭐라롱꼰이 생존시 애호했다고 전해지는 장미, 시거, 브랜드위스키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가능한 한 핑크색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핑크가 화요일의 색이고 화요일은 쭐라롱꼰이 태어난 요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자들은 귀신에게나 올리는 삶은 돼지머리를 바치는가 하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악사와 무희들을 불러 가무의 정성을 바치기도 한다. 쭐라롱꼰에 대한 경배는 지난 수년간 갈수록 퍼지고 있다. 그의 초상화를 모신 제단은 이제 가게, 식당, 여염집 등 도처에서 발견된다. 많은 금은방들은 라마 5세의 제단을 가게 중앙에 모셔놓고 장사가 잘 되기를 빈다. 그의 사진을 담은 핀이나 메달이 마치 영험있는 부적처럼 잘 팔린다.
쭐라롱꼰왕 숭배를 둘러싼 최근의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그동안 다각도로 설명되어 왔는데, 공통적인 견해는 그것이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 민감한 태국 중산층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즉 이들은 지난 수십년간 빠른 경제성장과 급격한 사회변화를 통해 새로운 사회적 욕구와 영감을 갖게 되었지만 종래의 귀신신앙은 이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며, 새로운 사회적, 문화적 갈등들을 전통적인 불교가 만족스럽게 해결하거나 설명하지 못한다고 본다. 그리하여 근대화, 발전, 번영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라마 5세에게서 새로운 수호신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혹은 민중의 일상적인 이해관계로부터 갈수록 멀어져 가는 국가권력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는 중산층이 더욱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갈망하는데, 이때 개혁가로서의 쭐라롱꼰왕을 숭배함으로써 이상적인 국가상에 대한 그들의 모색을 표출한다는 것이다.
쭐라롱꼰왕에 대한 숭배는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 왕실에 대한 타이 사회의 깊은 신뢰를 반영한다. 푸미폰왕이 오늘날 타이 사회의 구심점이자 안정의 상징으로서 존경받고 있는 것만큼, 타이 사회는 짜끄리 왕조를 긍정적으로 쳐다본다. 비록 국정보다는 연극과 문학에 더욱 많은 정열을 쏟았고 동성연애의 성향을 지녔던 라마 6세 와치라웃, 우유부단한 성격의 라마 7세 쁘라차티뽁, 그리고 비극의 주인공 라마 8세가 그 사이에 있으나, 이들은 방콕 왕조의 위대한 두 왕인 쭐라롱꼰과 푸미폰의 찬란한 후광의 그늘에 편안히 누워 있다. 태국 국민은 방콕 왕조의 맥이 쭐라롱꼰, 그리고 그의 손자인 푸미폰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적잖이 만족하고 있는 듯 하다.
1982년 푸미폰 국왕은 심장장애와 폐렴으로 수개월간 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었다. 이 때 그의 후계자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푸미폰에게는 1950년에 결혼한 시리킷 왕비와의 사이에 세 명의 자식이 있는데, 그 중 장남이자 외동아들인 와치라롱꼰 왕자가 이미 1972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후계자가 확정된 것은 결코 아니다. 현행의 태국 헌법에 의하면 왕이 그의 후계자를 선정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만일 왕이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으면 추밀원이 후계자를 선정할 수 있는데, 이 때 공주도 선정대상이 될 수 있다. 이에 따라 평판이 좋지 않은 왕자 대신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맏공주 시린톤이 라마 10세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다양한 국제적 행사들을 주관하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거의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시린톤 공주는 국내외에 폭넓은 지지자를 갖고 있다.
그러나 왕위계승에 관한 논의는 아직 시기상조이다. 95년 초에 심장수술차 일시 병원신세를 다시 졌지만, 그의 깡마른 체격과 부지런한 활동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건강은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주치의들의 말에 의하면 1927년생인 왕은 아직도 2, 30년 정도는 너끈히 나라를 위해 봉사할 수 있다. 이것은 정말 태국 국민 모두가 바라는 바다.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 혼란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 푸미폰왕과 같은 국가의 기둥이 있는 것은 태국으로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동남아 선교정보센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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