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와 태국의 시민사회

Posted by 향수코디
2008. 1. 28. 15:21 태국정보
조흥국(부산대 국제대학원)

태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오던 군부, 관료, 사부문(private sector), 시민사회 등은 세계화의 1990년대를 지나면서 그 각각의 위상에 있어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이 중 사부문은 민간자본의 기업가 계층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태국의 군부는 1970년대 이후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우선 1975년 베트남전쟁의 종식과 그 이듬해 태국 내 군사기지들로부터의 미군 철수는 태국 군부에게 미국으로부터의 물질적 지원의 축소뿐만 아니라 군부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이념적 근거가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태국 군부는 1980년대 말 태국공산당이 무장투쟁을 종식함으로써 그 이념적 근거와 미국으로부터의 군사적 지원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군부는 그밖에 1980년대 초 쭐라쫌끌라오(Chulacomklao) 육군사관학교의 졸업기수에 따른 군 장교들간의 알력과 파벌 분쟁으로 내부적 응집력이 약화되었다.
결정적인 요인은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탈냉전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정치적 정당성을 완전히 상실한 점이었다. 1970년대 이후 점차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까지 태국의 정치적 발전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힘이었던 군부는 1991-92년에 재집권을 시도했다. 그 시도는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강해진 시민사회의 힘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간다.

시민사회는 1990년대를 지나면서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관료와 사부문의 기존 제도적 세력들과의 관계에서는 여전히 약하다. 그에 비해 관료와 사부문의 자본가 집단은 1992년의 민주화와 1997년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강력한 정치 및 경제적 위상을 갖고 있다.
태국의 사부분의 주도적인 회사들은 1980년대에 정부의 수출지향적 산업정책에 따라 그 이전보다 정부의 후원을 더욱 많이 받았다. 예컨대 그들은 관세율과 다른 무역 장벽들을 통해 외국 자본의 경쟁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사부문 측에서도 적극적이었다. 그리하여 태국의 세 주요 회사 연맹인 태국은행연합(Thai Bankers Association), 태국산업연맹(Federation of Thai Industries), 태국상공회의소(Thai Chamber of Commerce)는 공사자문합동위원회(Joint Public-Private Consultative Committee)를 통해 정부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도록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로비를 했다. 이것은 적어도 1990년대 초까지는 효력을 발휘하여, 태국의 경제정책이 많은 경우에 있어서 사부문의 기업들의 비즈니스 활동에 유리한 방향으로 수립되고 시행되었다.
사부문은 1990년대에 들어서서 대개는 태국에서의 민주화와 대중들의 정치참여의 증대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들의 주관심은 정치적 연결을 통해 자신들이 더욱 많은 부와 권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1990년대 태국의 여러 선거에서 금권정치(money politics)가 행해진 것에는 그들의 기여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경제적 호황은 “새로운 돈”(new money)이라고 불린 새로운 기업가 세대를 낳았다. 이들은 대개 기존의 사부문 기업가들에 비해 더욱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며 더욱 개방적인 시야를 지녔고 정치적으로는 더욱 진보적인 경향을 지녔다. 이들의 일부분은 심지어 1992년 민주화 시위에 참가했거나 그것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것은 그들이 태국의 오래된 자본가 집단들의 소수독점적인 힘을 침식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투명성 있는 법질서를 수립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세대의 기업가 계층도 스스로 권력의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되자 정치권과의 관계를 형성함으로서 자신들의 사업상 이해관계를 보호ㆍ확대하기 위해 노력한다. 1990년대 중엽이 되면, 그들 중 태국의 최대 통신업자인 탁신 시나왓(Thaksin Shinawatra) 등 몇몇 사업가들은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들은 그렇다고 정치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사업적인 전략 추구의 차원에서 정치적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태국의 사부문은 1997년 경제위기로 숱한 기업들이 도산하고 경제가 침체하게 되자, 직접적인 정치적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경제위기 발발에 있어서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고 판단된 태국의 기성 정치권에 대해 불만과 불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태국의 시민사회가 비슷한 시기에 정부의 국가 운영에 대한 능력을 의심하여 경제 및 사회 문제의 해결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활동을 전개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였다.
1997년 경제위기 후 사부문 기업가 계층의 적극적인 정치활동은 1998년 7월 탁신이 창당한 타이락타이(Thai Rak Thai) 당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타이인들은 태국을 사랑한다”라는 뜻을 갖는 그 명칭에서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이 정당은 다소간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타이락타이 당의 경성에 관여한 주요 사부문 기업인 그룹에는 탁신 외에도 흔히 CP로도 알려져 있는 짜런 뽁판(Charoen Pokphand) 회사의 기업주와 경영진들, 그리고 Bangkok Metropolitan Bank의 경영진이 포함되어 있었다.
탁신은 타이락타이 당의 창당 목적이 태국 정치의 개혁에 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경제위기 시대 태국 연립정부를 이끌었던 추안의 민주당이 무역 자유화와 국영기업의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추구했던 것에 반해, 타이락타이 당은 중소기업을 지원하고 농업 부문의 활성화를 통한 경제성장을 강조했다. 이러한 정책은 그러나 CP 등 타이락타이 당의 몇몇 지도부 자본가 그룹의 이해관계와 상치된 것이었다. 게다가 타이락타이 당은 사노 티엔통(Snoh Thienthong) 등 금권정치로 악명 높은 몇몇 보수적인 정치인들을 영입했는데, 이것은 이 당이 애초에 보여주었던 개혁적인 이미지를 퇴색시켰다.
타이락타이 당은 2001년 1월 선거에서 승리하여 제1당으로 집권하게 되었다. 타이락타이 당의 승리는 자본주의가들의 승리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1997년 신헌법 제정으로 정치적 개혁을 이룬 시민사회의 힘에 대한 배반이자 도전이었다. 타이락타이 당의 당수인 탁신이 승리한 것은 그가 새로운 정치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킬 새로운 정치인으로 비쳤기 때문이었다.

참고문헌
Ukrist Pathmanand. "Globalization and Democratic Development in Thailand: The New Path of the Military, Private Sector, and Civil Society.” Contemporary Southeast Asia 23(1), 2001: 24-41.
Kevin Hewison, ed. Political Change in Thailand: Democracy and Participation. London: Routledge,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