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21세기초 태국 왕권의 지속성과 변화

Posted by 향수코디
2008. 1. 28. 15:23 태국정보
근대화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19세기말-21세기초 태국 왕권의 지속성과 변화

조흥국(부산대 국제대학원)

- 이 글은 2004년 6월 23일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한국태국학회와 부산외대 아시아지역연구소 공동으로 개최된 <아시아 지역문화의 현황과 과제> 학술회의에서 발표되었음
- 전문은 첨부파일 참고
이 글은 19세기 말 이후 근대화와 민족주의의 시대에 있어서 그리고 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 이후 태국의 왕권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연구이다. 연구의 초점은 입헌군주제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태국의 국왕이 어떠한 배경과 요인 때문에 오늘날 사회문화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조사하는 데 놓여 있다. 필자는 그 배경과 요인으로 다음의 두 가지 측면을 중시한다.
첫째는 19세기 말 이후 태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타이 민족주의가 국왕을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서양 열강들에 의한 식민지화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 열강들의 모델을 좇아 근대화를 이룩하려는 힘으로서 태동되고 전개된 타이 민족주의는 아시아의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와는 달리 “위에서 밑으로” 발달했으며, 그 힘의 중앙에 국왕이 있었다. 종래 대부분의 연구들은 태국에서 타이 민족주의의 등장과 이것을 바탕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근대적 국민국가 개념이 와치라웃(Vajiravudh) 왕 즉 라마6세(재위 1910-1925)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Vella 1978: xiii). 그러나 필자는 타이 민족주의와 근대적 국가 개념이 쭐라롱꼰(Chulalongkorn) 왕 즉 라마5세(재위 1868-1910) 시대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밝힐 것이며, 나아가서 그러한 태국 국가 개념의 형성에 있어서 국왕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입증할 것이다.
필자는 한 다른 연구에서 밝혔듯이 태국의 왕권 개념 변화의 역사에서 가장 큰 분수령은 쭐라롱꼰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사이의 이 시기 서양으로부터의 영향에 의해 국왕과 백성간 관계가 크게 가까워졌고 입헌군주제에 대한 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국왕이 근대적 국민국가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조흥국 2003: 184-186). 특히 마지막의 것은 쭐라롱꼰과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와치라웃에 의해 능동적으로 취해진 인식으로, 그 후 오늘날까지 태국의 국가 개념과 왕권간 관계의 성격이 형성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둘째는 태국의 현재 국왕인 푸미폰(Bhumibol) 즉 라마9세(재위 1946년 이후)의 영향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으로, 첫 번째가 보다 이념적인 측면에 대한 조사라면, 두 번째는 보다 실제적인 배경에 대한 조사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필자는 1950년대부터 푸미폰이 사회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고 특히 1970년대부터는 정치적으로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의 배경과 요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사릿(Sarit) 정권이 어떠한 동기로 푸미폰에게 국가의 구심점으로서의 전통적 위상을 회복시켜 주었는지, 그리고 이렇게 주어진 국가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푸미폰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사했는지 등에 대한 분석에 조사의 초점을 둘 것이다.
이 연구는 오늘날 태국 국가를 떠받치고 있는 세 개의 이념적 요소 즉 국왕과 불교와 민족 중 국왕을 다루는 것이다. 국왕과 더불어 불교는 전통 왕국 시대 ‘불교적 왕권’ 개념으로 결합되어, 왕권의 성격과 기능의 형성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19세기 말 이후 근대적 국민국가 개념의 발전에 있어서도 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바로 이 점이 태국 국가 개념의 독특한 측면이다. 이로써 위의 세 요소 중 불교와 결합된 ‘국왕’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자명해진다. 그리고 그러한 국왕에 대한 연구가 현대 태국의 국가에 대한 이해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도 드러난다.